바이낸스에서 약 63억 달러, 국내 보도 환산으로 약 8조 4천억 원 규모의 가상자산이 빠져나갔습니다. 거래소는 손실을 부담하겠다고 밝혔고, 일부 자산은 동결됐으며 출금 서비스도 단계적으로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소식을 합쳐 곧바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봐야 할 것은 돈이 빠져나간 경로와 다시 채워지는 경로입니다. 개인키가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어도 출금은 실행됐습니다. 또 회사가 고객 잔고를 뒷받침할 코인을 다시 사는 일과 공격자의 자산을 되찾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정입니다. 이 차이를 따라가면 거대한 피해액 뒤에 가려진 거래소 보안과 이용자의 보관 책임이 보입니다.
여기에 AI가 바꾸고 있는 공격 준비도 겹쳐 봐야 합니다. 북한 해킹 조직이 표적을 조사하고, 신분과 문서를 꾸미고, 코드를 다루는 데 AI를 활용한 기록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액이 빠져나간 마지막 거래뿐 아니라, 그 거래를 실행할 권한에 접근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20분 동안 벌어진 일, 그 뒤에 남은 숫자
공격은 10월 29일 20시 5분 UTC 무렵 시작됐습니다. 한국 시각으로는 10월 30일 오전 5시 5분입니다. 바이낸스의 두 번째 공지는 핫월렛이 침해돼 약 63억 달러의 토큰 자산을 잃었다고 밝혔습니다. 핫월렛은 출금 등을 처리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운용하는 지갑입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 Labs는 10개 블록체인에서 공격자 주소로 이동한 자산을 추적했고, 대부분이 약 20분 안에 빠져나갔다고 분석했습니다. 탈취 시점의 가격으로 평가한 규모는 약 63억 6천만 달러입니다. 여러 코인의 가격이 움직이는 사건에서는 집계 시각과 평가 가격에 따라 금액이 달라집니다.
국내에서 쓰이는 ‘8조 4천억 원’도 이러한 달러 추정액을 원화로 옮긴 숫자입니다. SBS 보도는 약 63억 달러를 이 규모로 전했습니다. 이용자 계좌에서 원화 8조 원이 한꺼번에 인출됐다는 의미로 읽기보다, 여러 가상자산의 평가액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피해 규모 다음에는 동결액이 따라붙었습니다. 바이낸스는 초기 대응에서 약 30억 달러의 자산을 온체인에서 동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동결은 공격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 조치입니다. 자산을 돌려받아 거래소 지갑에 다시 넣는 회수와는 단계가 다릅니다.
열쇠를 훔치지 않아도 출금이 실행될 수 있는 이유
바이낸스는 첫 공지에서 개발·운영을 맡는 DevOps 엔지니어의 노트북이 침해돼 서비스 컨테이너에 접근하고, 승인되지 않은 출금 거래를 제출했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컨테이너는 서버에서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실행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이후 조사에서는 추가 침해 지점이 발견됐습니다. 바이낸스는 두 번째 공지에서 복합적인 공격의 전체 순서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직원 한 명의 노트북 관리 실패만으로 끝내면, 회사가 아직 설명하지 못한 시스템의 연결 관계를 놓치게 됩니다.
특히 눈에 띄는 설명은 ‘지갑 개인키 유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대목입니다. 개인키는 자산을 움직이는 서명을 만드는 비밀값입니다. 그러나 개인키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과 올바른 요청에만 서명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보안 문제입니다.
출고 창고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도장을 금고에 넣어 관리해도, 도장을 찍는 기계에 잘못된 출고 요청이 들어가 그대로 승인된다면 물건은 나갑니다. 도장을 들고 달아나지 않았다는 설명만으로 출고 과정이 안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거래소의 실제 내부 구성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키 보관과 요청 검증이 별개의 역할임을 보여 줍니다.
TRM은 이더리움에서 계정의 실행을 다른 코드에 위임하는 EIP-7702 방식이 사용됐고, 다른 체인에서는 일반적인 서명 거래로 자금이 이동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관찰을 바탕으로 핫월렛 서명 인프라가 침해됐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특정 이더리움 기능 하나로 10개 체인의 피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사후 보고서에서 확인할 질문도 여기서 나옵니다. 직원 장비의 접근 권한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어떤 요청이 서명을 받을 수 있었는지, 대규모 출금을 중간에 차단할 조건이 있었는지입니다. 아래 질문들은 이번 사건의 확정된 결함 목록이 아니라, 회사의 설명이 충분한지 판단할 기준입니다.
- 진입최초 침해와 추가 침해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합니다.
- 권한침해된 시스템이 어떤 출금·서명 요청을 보낼 수 있었는지 봅니다.
- 차단주소·금액·속도 검사가 어떤 단계에서 작동했는지 봅니다.
- 복구기기와 접근 권한, 서명 절차를 어떻게 재검증했는지 확인합니다.
북한 공격 조직과 AI 도구의 연결
공격 주체에 관해서는 수사기관의 발표가 나왔습니다. FBI는 10월 31일 바이낸스에서 60억 달러 넘는 가상자산을 탈취한 활동을 북한의 TraderTraitor로 지목했습니다. 앞서 TRM이 높은 신뢰도로 제시한 북한 배후 분석에 수사기관의 귀속 발표가 더해진 것입니다.
이 조직은 AI와 무관한 곳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국·미국·일본 등 참여국이 대북제재 위반을 감시하는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MSMT)의 2025년 보고서 41쪽에는 TraderTraitor가 ChatGPT 계정을 확보했고, 2025년에는 DeepSeek를 이용하기 위한 계정도 확보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다만 계정을 확보했다는 기록으로 이번 바이낸스 공격에서 어떤 AI를 어디에 썼는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바이낸스가 밝힌 노트북 침해 가능성도 AI 피싱이나 위장 취업이 원인이었다는 설명은 아닙니다. 현재 공개된 근거로는 이번 탈취가 AI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대신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미 가상자산과 기업의 접근 권한을 노리던 조직들이 AI를 손에 넣었을 때, 공격 준비에서 무엇을 더 빨리 반복할 수 있게 됐느냐는 점입니다.
AI가 바꾸는 것은 침입 전의 준비부터
공격은 돈이 움직이는 순간보다 훨씬 앞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접근할지 조사하고,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제안을 만들고, 대화를 이어 갈 신분과 자료를 준비하는 일도 공격의 일부입니다. 사람을 속여 계정이나 실행 권한을 얻는 이런 방식을 사회공학이라고 부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북한 위협 조직 조사는 AI가 이 준비를 가속하는 사례를 보여 줍니다. 연구진은 Onyx Sleet가 8~9월 만든 표적별 PDF 미끼 파일 100개 이상을 식별했습니다. 메타데이터에는 수분 안에 수십 개 파일이 연이어 생성된 흔적이 있었고, 연구진은 AI 플랫폼의 산출물일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같은 문서를 그대로 뿌리는 것보다, 상대마다 다른 내용을 빠르게 준비하는 방향의 변화입니다.
가상자산 업계의 별도 침해 사례에서도 AI와 사회공학의 접점이 드러났습니다. 구글·맨디언트의 UNC1069 조사는 탈취한 메신저 계정과 가짜 화상회의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접근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피해자는 회의에서 본 다른 가상자산 기업 CEO의 영상이 딥페이크처럼 보였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만 맨디언트는 해당 영상의 AI 생성 여부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포렌식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코드를 다루는 과정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구글 위협 인텔리전스 그룹의 후속 보고서는 MIDNIGHT NEPTUNE, 기존 UNC1069로 추적하던 북한 연계 조직이 AI를 사회공학과 도구 개발 등에 접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조직과 앞의 Onyx Sleet 사례는 바이낸스 공격의 실행 기록이 아니라, 북한 연계 조직들의 AI 활용 범위를 보여 주는 별도 관측입니다.
이 자료들이 보여 주는 위협은 공격자가 혼자 모든 전문 지식을 갖출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조사와 문서 작성, 낯선 코드의 이해와 수정에서 도움을 받으면 기존 작업을 더 빠르게 반복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전체 공격 성공률이 얼마나 올랐는지, 바이낸스의 피해액 중 얼마가 AI의 영향인지를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관측한 북한 조직들의 AI 활용이 여전히 사람의 지휘 아래 있으며 완전한 자율 공격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습니다.
| 구분 | 역할 | 설명 | 예시 |
|---|---|---|---|
| 표적 조사 | 상대의 업무와 관심사 파악 | AI가 조직·직무·기술 정보를 정리해 접근 준비를 도울 수 있습니다. | 내 업무를 잘 안다는 인상만으로 상대의 신원을 믿기 어려워집니다. |
| 신뢰 형성 | 문서·신분·대화의 설득력 | 맞춤 문서와 자연스러운 표현을 준비하는 부담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 채용·투자 제안은 연락에 쓰인 경로 밖에서 상대를 따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
| 권한 통제 | 실제 실행을 허용하는 경계 | 상대가 그럴듯해 보여도 기기·계정·출금 권한에는 별도 제한이 필요합니다. | 직원 기기 하나의 문제가 큰 출금 권한으로 이어지지 않게 설계해야 합니다. |
예를 들어 채용 제안의 문장이 자연스럽고 내 프로젝트를 자세히 언급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상대가 해당 회사의 직원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연락받은 메시지의 링크를 따라가기 전에 직접 찾은 회사의 채용 창구나 기존 담당자에게 확인하는 식으로, 제안과 확인 경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번 바이낸스의 실제 침입 장면을 재현한 예시가 아니라, 위 관측에서 도출할 수 있는 대응 방향입니다.
바이낸스의 출금 보안 문제도 여기와 맞닿습니다. 최초 접근을 얼마나 잘 막느냐와 접근 뒤 어떤 권한을 허용하느냐는 각각 필요합니다. 공격자가 신뢰를 얻는 준비를 더 빠르게 할 수 있을수록, 직원의 눈썰미에만 기대지 않는 권한 분리와 요청 검증이 중요해집니다. 공격자가 밝혀져도 그 경계의 실패 원인은 별도로 설명돼야 합니다.
동결과 보전, 돈을 되찾는 두 개의 경로
가상자산이라고 해서 모든 자산의 통제 방식이 같지는 않습니다. TRM은 테더·서클 등 발행사의 스테이블코인 동결과 아비트럼 측의 조치를 추적했습니다. 반면 발행사가 같은 방식으로 동결할 수 없는 자산으로 옮겨 가면 대응 조건이 달라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동결 기능은 피해 확산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이면서, 그 자산에 누가 통제권을 갖는지 보여 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자유로운 이전을 강조하는 자산이라도 위기에는 발행사나 네트워크의 개입이 복구에 중요할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 위에 있다’는 공통점만으로 보관·동결·회수의 성격까지 같다고 보면 안 됩니다.
바이낸스가 진행하는 보전은 또 다른 경로입니다. 10월 31일 복구 공지는 SAFU 이용자 보호 기금 일부, 선물 보험기금 일부, 회사 자금을 활용해 필요한 코인을 매입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원래 탈취된 코인을 공격자에게서 돌려받지 못해도 회사가 같은 종류의 코인을 확보하면 고객 잔고를 다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전율이 올라갔다는 소식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범인에게서 되찾은 비율로 바꾸어 읽으면 안 됩니다. 동결된 돈의 회수에는 별도 절차가 남아 있고, 매입한 자산은 회사의 재무 부담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 구분 | 역할 | 설명 | 예시 |
|---|---|---|---|
| 동결 | 이동을 막는 조치 | 공격자가 자산을 추가로 옮기지 못하도록 묶습니다. | 동결만으로 거래소에 반환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 회수 | 탈취 자산을 돌려받는 과정 | 수사·발행사·협력사의 대응을 통해 반환을 추진합니다. | 동결액과 실제 회수액은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
| 보전 | 고객 잔고를 다시 뒷받침 | 회사가 필요한 자산을 확보해 부족분을 채웁니다. | 공격자의 반환 없이도 회사 자금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
보전율 95%와 출금 재개 이후에 확인할 것
11월 1일 네 번째 공지에서 바이낸스는 피해 자산의 약 95%를 보전했다고 밝혔습니다. 남은 약 5%는 주요 10개 자산 밖의 토큰이며, 유동성이 낮아 필요한 수량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회사의 진행 상황 발표로 읽어야 합니다.
출금도 자산과 네트워크별로 순차 복구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USDT라도 어느 네트워크로 출금하는지에 따라 확인할 상태가 달라집니다. 이용자가 봐야 할 것은 ‘출금 재개’라는 제목 하나보다 실제 사용할 자산·네트워크의 지원 상태와 처리 결과입니다. 보전 약속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점은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준비금 증명인 PoR도 함께 봐야 합니다. 바이낸스는 10월 31일 스냅샷을 공개했으며, 전체 영지식 증명은 11월 3일 UTC까지 생성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안내했습니다. 스냅샷은 특정 시점의 자산 상태를 보여 주는 자료이고, 증명은 회사가 제시한 검증 범위 안에서 잔고의 뒷받침을 확인하는 수단입니다.
그 범위를 회사 전체의 재무 건전성이나 앞으로의 출금 안전성으로 넓힐 수는 없습니다. 미국 PCAOB 투자자보호실의 안내도 PoR이 재무제표 감사와 같지 않으며, 부채와 고객의 권리·의무 등을 충분히 다루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잔고가 존재하는지, 지금 출금 가능한지, 같은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는 각각 확인해야 합니다.
거래소에 맡기는 편리함과 직접 보관하는 책임
거래소 계정의 비밀번호를 지키는 일만으로 거래소 내부의 출금 시스템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이용자 각자의 로그인 보안과 자산을 맡긴 회사의 운영 보안이 다른 층위라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보관하면 모든 위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직접 보관하는 지갑에서는 복구 문구를 잃거나, 잘못된 주소로 보내거나, 위험한 서명 요청을 승인하는 책임이 본인에게 돌아옵니다. 보관 장소를 바꾸려면 먼저 복구와 전송 과정을 이해하고 작은 금액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점검할 것은 보유 금액의 크기보다도 자산을 언제 써야 하고, 누가 이동을 통제하며,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복구를 의존하는지입니다. 거래에 필요한 자산과 오래 보관할 자산을 구분하면 각 보관 방식에 맡기는 역할을 더 분명히 정할 수 있습니다.
바이낸스가 회복해야 할 신뢰도 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코인을 다시 채웠는지, 이용자가 실제로 출금할 수 있는지, 잘못된 요청이 다시 서명되지 않게 무엇을 바꿨는지입니다. AI가 공격 준비를 돕는 시대에도 이 질문은 남습니다. 사람이나 문서가 그럴듯해 보이는 것과 자산을 움직일 권한을 줘도 되는 것은 다른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8조 원대 피해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경계를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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